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 3:13~18)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니엘(벨드사살)의 세 친구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는 풀무불(용광로, 불가마)에 던져지는 시험을 당했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망령되게도 '두라' 평지에 자기 신상을 세워놓고 그 신상에 만천하 백성은 모두 절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왕과 타협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들도 회유와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됩시다.

  1. 타협하지 않는 신앙.
  16절 말씀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 어떤 논쟁이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하나님 앞에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이즘'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 어느 하나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절대자 하나님을 배제하는 악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적 신앙을 버리고 상황에 따라 타협하는 믿음을 갖기 쉽습니다. 신앙은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심지 경고한 자가 됩시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시키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지조가 있었습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진다고 해도, 아니 평일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이라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절개가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안돼!"라는 신앙의 지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인을 환난에서 구원하십니다.

  2.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시인하는 신앙.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왕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했습니다. 17절에 보면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고 했스빈다. 불 속에 던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의 말씀에 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내 귀에 들리는 음성이 없어도, 성경 실력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시121편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화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시인할 때 시험은 물러갑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세 친구의 믿음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 18절 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줄을 아옵소서." 설령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서 건져 내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 섬기고 금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의 백성이 된 것만 해도 이미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박국처럼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7, 18)
  단 3:25절을 보면 네 사람이 불 가운데 있는데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드로가 같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신들의 아들 같은 분은 바로 '구약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곳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보호해 주신것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본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 회개하며,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알곡입니까? 쭉정이 입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죄악과 타협하지 마십시다.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시인하십시다. 그리고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믿음을 가집시다. 그래서 불같은 시험을 다 이기고 보는 모든 이로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세 친구와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말씀 : 2009년 9월 6일 주일예배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사도행전 10:1~8)


  하나님은 경건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경건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본문은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신앙은 진실한 신앙, 두터운 신앙을 말합니다. 그럼 '경건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외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경한다느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넬료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 즉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는 권력도 있고, 돈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두려워 할 줄 알면 그 신앙은 된 신앙입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면 하나님을 멀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면 범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복을 받읍시다.

  2. 항상 기도하는 사람
  고넬료는 경건하여 항상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는 경건하게 사는데 필수과목 입니다. 기도 없이는 경건한 사람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32편 6절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식사하기 전에, 차를 운전하기 전에, 직장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도, 잠자기 전과 일어나서도 기도합니다. 가장 경건한 사람은 새벽기도에 나와 기도합니다. 일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면 목사인 저도 감탄합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했을 뿐 아니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3절) 유대인들은 하루 세번씩 기도했는데,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그 좋은 점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유대인들 처럼 그들의 장점을 이어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인격이 변화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인생이 변화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막힌 담이 무너집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충만을 받습니다.
  철학자 '세네카'는 "그림의 떡은 떡이 아니요, 붙지 않은 불은 불이 아니며, 간절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면 경건한 사람이 되지 말라 해도 경건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이웃을 섬기는 사람
  2절에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라고 했습니다. 약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르 ㄹ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혼자서 거룩하다고 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함께 하지 않는 경건은 형식적인 경건입니다. 참 경건이 아닙니다.
  고넬료는 사람과 하나님이 인정해 줄 정도로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습니다. 자기 백성도 아닌 다른 나라 백성, 사람취급도 하지 않던 식민지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주님의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눅 12:33). 바울은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살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고 했습니다.
  경건한 고넬료는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라자의 지시로 베드로를 만나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온 집안 식구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고넬료를 통해서 이방선교의 문이 열리고 로마까지도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나 한사람의 진정한 경건이 세상을 변화 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경건하십시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이웃과 함께 하며 사랑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 내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말씀일 : 2009년 5월 24일 주일예배시간

행복한 가정(골로래서 3:18~21)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의 관계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격노케 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룹시다.
  가정은 사람을 사람 되게 만드는 공장입니다. 사회와의 관계를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 부부, 자녀 세가지 체계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 체계가 잘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 체계중에서 그 중심은 부부입니다. 부부가 하나되어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또한 부부가 하나 되어 자녀를 교육시켜야 합니다. 부부가 하나 되지 못한 효는 온전한 효가 될 수 없습니다. 부부유별, 부자유친이 부부유친, 부자유별로 바뀌어야 합니다. 부부가 친밀해야 가정이 행복해 집니다.
  유교의 효 사상은 부모중심의 효 사상이며, 기독교의 효 사상은 부부중심의 효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부부가 하나 되어 효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창2:24 말씀을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하나 되어 자발적으로 효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부모님의 효를 보면서 자라는 자녀들이 진정한 부부의 사랑과 효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며, 반대로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1.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아내들은 머리되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18절). 바울은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여자가 그 후에 창조되었다고 하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며(딤전 2:13), 둘째는 남자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복종하듯,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신성의 질서(고전11:3)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복종은 열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단순히 여자가 아닌 남자가 가정의 머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몸 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엡5:28~29).
  이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 보다 더 포괄적이고 큰 임무에 속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듯이 남편들도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도, 수하에 있는 사람도 아님을 남편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아내'는 '내 안에 있는 태양'이란 뜻입니다.

  3.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20절). 구약성경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 불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규정하고 엄한 징벌을 명하고 있습니다(출21:17, 레20:9). 반면에 부모에게 순종한는 자는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ㅣ12)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요셉과 그의 모친 마리에게 순종하심으로써(눅2:51)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 안에게 기쁘게 하는 것' 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것은 자녀의 순종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의 질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으니라.'(엡 6:1)고 했습니다.

  4.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21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비들아'라고 한 것은 어머니들까지 포함하는 의미를 갖습니다(잠1:8). 그와 같이 부모들은 자녀들을 격노케 하거나 불합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자녀들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엡6:4). 자녀들을 격노케 하면 그들은 낙심하게 되고 결국에는 잘못된 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을 무조건 책망함으로써 격노케 하지 말고 '사랑의 훈련' (히12:7)과 함께 '주의 교양오가 훈계'(엡6:4)로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말씀일 : 2009년 5월 17일 주일예배시간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예레미야 8:18 ~ 22)


  지금 우리는 개인, 가정, 사회, 교회, 나라, 민족, 세계가 여러 문제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안으로는 사회적 혼란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 밖으로는 세계경제의 파동과 이방종교와 이단의 득세 등 심히 어렵습니다. 우리 성도들과 교회에 주어진 숙제 또한 큽니다. 우리 앞에 당면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것을 오늘 본문이 잘 가르쳐 줍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시 멸망한 이스라엘을 향해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면서 22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할 모든 방법을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1. 기도입니다.
  22절에 길르앗의 유향이 나옵니다. 이 유향은 기도를 상집합니다. 기도는 '신령한 유향'입니다. 출 30:34~38 성막에서 쓰는 향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 3:8에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햇습니다. 계 8:3에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왜 향일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기뻐하실까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큰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을 잘하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를 잘하면 우리 영혼이 살고, 기도를 잘하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이 기도의 유향은 길르앗의 유향처럼 너무나 유명해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사업을 하던 사람이 부도가 났습니다. 빚을 갚고 나니 수중에 있는 돈은 500만원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돈으로 필리핀의 파나이 섬에 교회 하나를 지어 봉헌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망고나무 아래서 예배하던 파나이 사람들은 그 교회 이름을 '부도교회'라고 짓고, 감사해서 날마다 돈을 보낸 성도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도났던 그 성도는 다시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처럼 신기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의 상처가 깊어도 기도하면 그 상처가 낫습니다. 아무리 불가능한 육신의 질고가 있어도 기도하는 자에게 치료의 역사가 있습니다. 기도를 성실히 잘하면 마음과 신체가 정화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면 환경이 변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는 정말 신기한 길르앗의 유향입니다. 기도는 인생을 고치고, 영혼을 고치고, 세상을 고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길르앗의 유향입니다.

  2. 말씀입니다.
  22절 말씀의 '치료하는 유능한 의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말씀'은 '의사'입니다. 시 19:7에 "여호와의 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요 6:68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출 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
  마 9:12~13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유향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사용하는 기술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 역시 아무리 좋아도 말씀의 빛을 받아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씀을 떠나면 응답이 없습니다. 말씀 없는 기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더 풍성하지 못합니다.
  길르앗의 유향과 의사와 같은 기도와 말씀만 있다면 은혜 받지 못할 수 없고, 해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에 서서 믿고 회개하며 드리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외면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신령한 길르앗의 유향과 의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주님께서도 말씀과 기도의 무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더 이상 낙심치 말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기도의 신비한 무기를 사용할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영육 간에 행복하고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며,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말씀일 : 2009년 4월 19일
부활의 메시지 (마가복음 16:1~11)


  주님이 무덤 속에서 보내신 안식일은 마지막 안식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율법 종교의 가치관이 끝나는 날이며,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날이 밝아 왔습니다.

  1. 부활의 새 아침(1~5절)
  갈릴리에서 온 여러 여자들이 안식 후 첫날 향품을 가지고 예수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그 시체를 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향을 바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 그녀들은 예기치 못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들이 걱정했던 무덤 문이 이미 열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안에는 이미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무덤 안에서 발견한 것은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흰 천사였습니다(마 28:2, 3). 의(세마포)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사랑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사람을 무덤 속에 장사지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 뜻밖의 놀라운 일을 만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마음만 먹어도 축복을 받습니다. 하는 시늉만 해도 축복을 받습니다. 거둘어주기만 해도 복을 받습니다.

  2. 천사가 전해준 부활의 메시지(6~7절)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틀림없음을 확인시켜준 천사는 이제 그녀들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는지라"(6~7절).
  주님께선 그의 대적자들과 대중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는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과 순종함으로 따르는 제자들만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메시지를 힘입어 약함에서 강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허무함에서 희망으로 변화되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메시지는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당하시기 전부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누누이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26:32, 막 14:28). 이제 제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는 곳입니다.

  3. 부활의 첫 목격자(9~11절)
  본문 말씀은, 요 20:11~18과 같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마리아라고 합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그녀에 대해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라고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자에게 나타나십니까?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마가가 소개한 대로 그녀는 하나도 아닌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그녀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새사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실 때도, 무덤에 장사되어 주검으로 변했을 때도,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그녀는 최대의 사건인 부활을 처음 목격하게 되는 은총을 입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둘째로,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는 자에게 부활이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할 때 제자들은 겁이 나서 다 도망갔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주님을 지켜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제자들은 흩어져 실망 중에 울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자는 주님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니라"(렘 29:13)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 문제의 해결과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갈급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되 열정적으로 사랑합시다. 주님은 '나를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말씀일 : 2009년 4월 12일
나를 기념하라 (고린도전서 11:23~29)


  성찬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유월절 만찬에서 성찬예식을 서도들이 지켜 행하여야 할 영원한 규례로 주셨습니다. 다함께 떡을 떼고 포도즙을 마심으로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생각하며 대속적인 죽음을 기념하게 하신 것입니다. (눅 22:17~20).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성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고린도 교인들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찬의 참 의미와 성찬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애찬과 성찬

  초대교회 당시의 성만찬은 오늘날의 성찬예식과는 달리 일종의 애찬식의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주일 저녁에 모일 때마다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서 공동식사를 하고, 마지막에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주의 만찬을 기념했습니다(벧후 2:13, 유1:12). 공동으로 나누는 식사와 성찬의 전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되새기고,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책망은 현대 교인들에게도 매우 큰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속의 은혜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는 성찬은 단순한 형식일 뿐 주님의 뜻에 합당한 성찬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성찬의 참 의미(23~26절)

  성찬 예식은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예식입니다(마 26:26~28, 막 14:22~24, 눅 22:19~20). 주님께서 이 예식을 제정하시고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를 행하여야 합니다. 이 의식은 어떠한 의식보다도 존중되고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식은 예수님의 권위로 집행되어야 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분문 24~25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떡과 잔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희생시킴으로써 믿는 모든 자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영생의 길입니다.(요 3:16, 롬 5:9~11, 8:35~39, 갈 2:20).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를 깊이 새기고 감사는 예식입니다. 또한 성찬에 참예하는 자는 복음전파를 다짐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 할 뿐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전파해야 합니다(26절). 그러므로 전도에 소홀히 하던 성도들도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전도에 대하여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모든 족속에게로 가서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마 28:19~20).

  3. 성찬에 참여하는 자세(30~34절)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27~32절). 성찬을 받기 전에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죄지은 일이 없는지 살펴본 후에 그 죄들을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성찬에 참예 할 수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찬을 받으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29절),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27절).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토록 무서운 죄를 당연히 살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33~34절). 온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형제오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형제자매를 돌보고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과 행동으로 성찬에 임하였을 때 그 결과는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27~32절). 생명의 단축과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징계라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된 마음과 자세로 성찬에 임하게 된다면, 주님과 연합되며 신령한 은혜를 받게 되고, 더욱더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성찬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말씀일 : 2009년 4월 5일
세례의 의미 (골로새서 2:11~12)


  1.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

  1) 세례는 완전한 단절입니다. 이 단절은 죽음처럼 종결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세례 의식을 예시로 사용하여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같은 의미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같은 의미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 죄가 씻겼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2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례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 '세례'는 매장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우리들이 '흑암의 권세에서' 풀려나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극적인 변화를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골 1:13)
  분명히 이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세례가 아닙니다. 세례는 이 변화를 상징해 줄 뿐이며, 실제의 변화는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죽고 또 살아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되는 사건입니다. 새 생명은 세례의 물속에서 태어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탄생됩니다. 생명은 믿음 자체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일을 합니다.

  2. 세례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믿음을 받고 변화된 자를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화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외적인 모양과 내적인 심성이 온전히 새로워진 사람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반열에 서게 된 사람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친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가 주신 모든 말씀을 상고하며 그대로 지켜나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의 의식에 참여한 자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거듭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을 준행하며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되는 생활을 하기 위해 애쓰는 자만이 그의 안에 내주하시며 항상 동행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앞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세례는 구원의 표

  세례는 구원의 표징과 약속이 됩니다. "물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벧전 3:21). 베드로는 세례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편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구원의 표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입니다. 구원은 율법이나 세례, 또는 다른 의식이나 요식 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즉 세례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에 상징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순종하겠다는 의미에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미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가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표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나의 백성' 이라는 인침이요 증ㅍ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가 구원의 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은 육신에 묻은 더러운 것을 제할 수는 있지만 더러운 죄악을 깨끗케 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세례는 정결함을 나타내는 상징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례가 비록 죄악을 깨끗케 씻어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양심을 깨끗케 하여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세례는 우리가 예전에 죄악 된 옛 생활에서 이미 죽었음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자신을 계속 살피면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일 : 2009년 3월 29일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43장 4~7절)


  현대는 컴퓨터가 신입니다. 사람들은 기계의 노예가 되고, 컴퓨터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사람들은 가장 자유로운 세대에 사는 것 같지만 기계에 종살이하며 삽니다. 해방된 것 같지만 기계, 기술, 정보 등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가 없이는 누구나 노예의 사람을 삽니다.
  우리 민족은 과거 일제 강점기 때 독림을 위하여 3.1 운동을 일으켜습니다. 올 해로 3.1절 90주년이 되었습니다. 자유는 최고의 행복이며 최대의 영광입니다. 3.1절을 맞이하여 다시 자유의 참 의미를 살피고 자유를 얻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자유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내가'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옵니다. 이 말씀은 자유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확인시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셔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역사의 축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고 하여씁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주인입니다. 눅 4:18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합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윈스터 처칠은 "인생의 처음 25년 동안 나는 자유를 갈구했다. 그 다음 25년 동안 나는 질서를 추구했다. 그 다음 25년 동안 나는 질서가 곧 자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그 질서 안에서 참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질서를 알고 자유를 압니다. 육신의 자유를 버릴 때 하나님의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자유 할 때만이 영원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보배롭고, 존귀하게' (4절)라는 말씀은 사랑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살 길은 주변국이나 강대국들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민족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지난날의 해방의 역사를 보심시오. 일본의 ㄱ만이 극도에 달해 무모한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일로 미국을 태평양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였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해방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독립투사들이나, 국제적 도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결정적 계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서 살 때에 비로소 해방이 있고,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의 자유를 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3. 자유는 하나님의 지으심 때문입니다.
  7절 말씀에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창조한 자'라고 합니다. '지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같은 의미의 세 단어가 반복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조성, 완성의 세 단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시 피조물 가운데 손으로 빚은 존재가 사람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말씀으로 "있으라"고 하셨지만 사람은 정성껏 손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정성이 담긴 피조물이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고전 7:22에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신 자유의 사람입니다.
  제임스 에이지는 인간을 '날개가 땅에 못 박힌 성난 청사'로 묘사하였습니다. 날개가 땅에 못 박히면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땅에 박힌 속박의 못에서 빼내고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은총입니다.
  갈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자유함 가운데서 자유를 얻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일치하고 단결하여 이제는 완전한 국토, 국론의 통일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일 : 2009년 3월 1일
지붕을 뜯어내는 믿음 (마가복음 2장 1~12절)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여러 번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극도의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이 모든 불가능의 한계를 극복하고 승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중풍병자인데 자신과 친구들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깨끗이 치료 받고 일어나 침상을 들고 나가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 생각의 한계를 넘는 믿음입니다.
  1절에,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했습니다. 이 평범하고 간단한 문장 속에는 '나도 예수님을 만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중풍병자의 믿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소문을 확신으로, 나를 향한 기쁜 소식으로 믿었습니다. 중풍병은 고치기 어려운 불치의 병이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주님을 만나면 이 병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의 한계'를 넘는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을 수 없다고 생각했떤 그 생각의 틀을 깼기에 한께를 극복 할 수 있었습니다.

2.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혼자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홀로 일어나 걸을 수 없는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좋고 건강한 네 사람의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친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도움의 손길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길이 보입니다. 내가 못한다고 낙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라는 믿음 안에 언제나 서시기 바랍니다.
  다윗에게는 요나단이 있었고, 바울에게는 누가와 바나바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이 있었고,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홀로 싸우는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름 꿇지 않은 자 칠천을 두셔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3. 방법의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마음이 바뀌었고, 함께 일할 믿음의 동지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장벽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장애물이었습니다. 2절에 보니까 '사람들이 많아 용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 앞에 가까이 가려고 할 때 사람이 장애가 될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가로막고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와 네 친구를 보심시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절을 보면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 침상을 내릴 만한 구멍을 내었습니다.' 남의 집이고, 먼지도 떨어질 것이고, 설교시간인데 가능한 일이겠습니가?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방법의 한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방법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자신의 방법으로 안 된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속히 내 방법을 고집하는 사고에서 벗어야 합니다.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은 생각과 능력과 방법의 한계를 초월해서 지붕을 뜯어내는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고 하셨습니다. 5절을 보니까 주님께서는 그의 병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니까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적이 없다면 나는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생각과 능력과 방법의 한께를 뛰어넘는 믿음 가지고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승리하고 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일 : 2007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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